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막은 전략 알아보기

거란(요나라)은 10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고려와 외교적·군사적 충돌을 반복하였습니다. 고려 초기 성종 시기부터 거란은 고려를 압박하며 조공을 요구하였고, 이에 고려는 거란과 대립하는 송나라와 친교를 맺어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거란의 침입은 단순한 국경 충돌이 아니라 고려의 독립성과 외교 정책을 둘러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거란의 침입이 발생한 주요 배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배경 설명 결과
거란의 고려 압박 고려가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자 거란이 이를 경계 거란과 고려 사이의 긴장 고조
1차 침입(993년) 거란 소손녕이 고려를 공격, 서희의 외교적 협상으로 강화 성립 고려가 강동 6주 획득
2차 침입(1010년)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거란이 대규모 침략 개경 함락, 현종의 나주 피난

현종의 대응 전략

현종(顯宗)은 거란의 2차 침입(1010년)을 맞아 고려를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펼쳤습니다. 고려는 일시적으로 수도 개경을 빼앗겼지만, 현종의 장기적 방어 전략과 고려군의 적극적인 저항으로 거란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현종은 직접적인 군사 대응뿐만 아니라, 외교적 접근과 국내 방어 체계 강화를 통해 거란의 위협을 극복하였습니다.”

수도 개경을 포기하고 전략적 후퇴

1010년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현종은 개경을 방어하는 대신 수도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피난하는 전략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군이 거란과 정면 충돌하여 전멸하는 것을 방지하고, 장기적으로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나주로 피난
  • 거란군이 수도를 점령했으나 고려의 체제는 유지
  • 장기전으로 전환하여 거란의 지구력을 약화

지방군과 민간의 저항 유도

고려군은 수도를 내주었지만, 지방 곳곳에서 거란군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습니다. 거란군은 개경을 점령했으나 식량 부족과 고려군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인해 장기 주둔이 어려웠습니다.

  • 지방군이 후방에서 지속적인 공격 수행
  • 민간 저항군이 거란군의 보급로 차단
  • 거란군이 점차 지쳐 후퇴를 고려

강력한 외교 협상

현종은 거란과의 전면전이 국가에 큰 부담이 될 것을 인식하고, 외교적 협상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고려는 거란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대신, 실질적인 독립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하였습니다.

  • 거란과 화친 조약 체결
  • 고려가 요나라 연호 사용 수락
  • 실질적인 독립 유지와 국경 방어 강화

성곽과 방어 체제 정비

거란의 침입 이후, 고려는 국방력을 대폭 강화하였습니다. 특히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방어 성곽을 건설하여 향후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 천리장성 축조(압록강~동해안 방어선 구축)
  • 군사력 강화 및 중앙군 재편
  • 국경 지역에 주둔군 배치

거란 침입 이후 고려의 변화

거란의 침입 이후 고려는 국방력 강화를 위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외교적으로도 신중한 전략을 유지하였습니다. 이후 3차 침입(1018년)에서도 강감찬이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며 고려의 방어 전략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정책 설명 결과
천리장성 축조 거란의 추가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 건설 국경 방어력 강화
군사 개편 지방군과 중앙군 강화, 전력 증대 국방 체계 안정
외교 전략 조정 거란과의 관계 개선 및 송나라와의 외교 유지 전쟁 방지 및 경제 안정

결론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단순한 군사적 대응이 아닌 전략적 후퇴, 외교 협상, 방어 체제 정비를 통해 효과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 장기적으로 안정시키고, 국방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현종의 전략적 후퇴와 장기적 국방 개혁은 고려가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살아남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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